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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으라
  • 2019.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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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정호승 씨는 수선화에게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러나 고독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고독처럼 인간을 힘들게 하고, 고독처럼 인간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도 외로움에 있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에 그 지독한 왕따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도 고독으로 인해 자살충동에 깊게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누가 봐도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혼자서 850명이나 되는 우상숭배자들과 싸워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가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불사르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혼자서 10, 20명도 아니고 850명을 물리친 능력의 종이요, 기도의 용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에 자신은 외톨이요, 왕따라는 느낌이 광풍처럼 밀려오자 그는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지금 내 생명을 취하여 주시옵소서.” 엘리야는 우상숭배자들과 싸우는 사람이 오직 자기 한 사람뿐이라 생각했고, 그 속에서 지독한 고독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고독은 인간을 쓸쓸하게 만듭니다. 슬프게 만듭니다. 좌절하게 만듭니다. 우울하게 만듭니다.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삶의 의욕을 꺾어버립니다. 그런데 이 고독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하게 혼자 있다고 해서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아도 마치 무인도에 홀로 서있는 것처럼 고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고, ‘고독한 군중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고독한 군중이라는 말은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이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사회학자가 1950년도에 출판한 책제목입니다. 이 책이 출판된 이래 하나의 용어처럼 사용된 말이 고독한 군중인데,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고독한 군중이라는 얘기입니다. 본래 고독이란 말은 말 그대로 혼자라는 것을 느끼는 데서 오는 외로움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과 어울리고 함께 있으면 고독하지 않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현대인의 고독은 이와 정반대의 현상을 가집니다. 많은 사람과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오히려 더 고독해집니다. 사람들이 주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 더 깊은 고독감을 느껴야하는 데 현대인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독이라는 병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습니까? 먼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깊은 내적 상처를 내보이고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혈루증이라고 하는 고질병으로 12년 동안이나 고생한 여인이 소개됩니다. 그 여인은 사람들 가운데서 철저하게 버림받고, 소외당하고, 고독하게 살아야 했는데, 어느 날 군중 속에 있는 예수님께 다가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여기서 옷자락에 손을 댔다.’라는 말은 원어로 붙잡았다.’라는 뜻입니다.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혈류의 근원이 마르고 그 지긋지긋한 질병이 떠났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여인을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으면서 치유의 기적을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구원받고, 고독의 문제를 완전히 극복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은 생명의 옷자락입니다. 능력의 옷자락입니다. 치유의 옷자락입니다. 환희의 옷자락입니다. 승리의 옷자락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기만 하면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상처가 치유됩니다. 기쁨을 회복합니다. 고독을 극복합니다. 모든 일에 승리합니다.